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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길거리 이야기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사랑" 이재명 의사를 알고계시나요? - 명동성당에서 찾은 독립운동 이야기 -


광복절이 이틀 앞으로 훌쩍 다가왔습니다


망국의 비극적 현실에서도 자주독립 국가의 꿈을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는 선조들을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는 일제강에 저항했던 선조들의 채취가 묻어있습니다. 이 곳 명동성동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언론악법 원천무효 서명운동을 하는 동안 발견하게 된  명동성당 들머리의 독립 운동 이야기 한 페이지를  꺼내고자 합니다.

명동성당 입구에는 눈에 띄지 않는  표지석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언론악법 원천무효 서명을 받는 반대쪽 명동성당
입구 모서리에
잘 눈에 띄지 않는 표지석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면으로 다가가 보았습니다. "이재명의사의 의거터"라고 씌여져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인력거를 타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습니다. 인력거꾼이 가로막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재명 의사를 가로막은 인력거꾼 박원순은 이재명 의사의 칼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이 죽은 줄 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이재명 의사는 22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이재명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09년 경의 종현성당(명동성당). 출처 : 안중근 의사 기념관>


 
멋진 양복을 입은 청년 이재명은 이듬해인 1910년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일제는  인력거꾼 박원문의 죽음을 이용해 이완용의 암살미수건만으로 사형을 받을 수 없던 이재명에게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1910년 9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하여 23세로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재명 의사가 하와이에서 체류 중 찍은 것입니다>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사랑", 이재명 의사를 만나다.


이재명 의사의 일생이 궁금해 며칠 간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박상우의 장편
소설 "칼"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소설은 이재명 의사의 짧았지만 강렬했던 삶의 기록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완용이라는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 거사를 일으키고 스물셋에 교수형을 당한 열혈남아의 기록이 역사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이재명 의사가 한명의 후손도 남기지 못했고, 부정확한 자료들만 남아있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파 그의 일대기를 소설로 재구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재명 의사의 의거에 대해 일본 검찰은 "오랜 전부터 조직적으로 준비되어온 치밀한 테러이며 천인공노할 폭력이라고 언성을 높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토 히루부미를 죽인 안중근의 예를 들어가며 이와 같은 범죄행위는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이재명 의사의 변론을 맡은 안병찬 변호사는 "매국적신 행위를 하는 이완용 같은 인사를 이 땅의 젊은 이들이 처단하려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애국의지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미 독립을 구가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오래전부터 있어온 자구행위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위는 테러도 아니고 범죄도 아니다. 이것은 다만 애국운동의 일종일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범죄는 이들이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매국적신들에게 물어야할 것이다."고 변론하였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죽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완용이 이미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으므로 나는 항상 그가 회개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회개는 커녕 이제 또 한 가지의 큰 죄를 더해 여덟 가지 죄를 지었으니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여 없애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랑으로 처단하려 한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박상우, '칼'에서 인용>

이완용은 일본 최고의 의술로 두달만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당시 조선말 매천야록, 대한매일신보 등의 사료에 따르면 이완용은 며느리 임걸귀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병원에 있는 이완용에 갖다바치는 뇌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천륜을 어겨 나라를 팔고,며느리를 취해 인륜을 어겼건만 이완용의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100년 지난 명동의 거리에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이재명의사의 기념비가 당당히 남아있습니다. 한민족 구성원 모두가 이완용과 일제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열사는 역사 속에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명동성당 들머리는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곳" 

이재명 의사는 "자신을 죽여 조선을 살리려는 사랑"에서 의로운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한 세기가 흘렀습니다.
2009년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의원직을 내던지고 명동의 들머리에 서있는 4선 의원과 초선 의원이 서 있습니다. 두 의원은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정치생명을 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수구언론은 이들의 진정성을 훼손하고자 갖은 비아냥과 모욕을 퍼붓기도 합니다.어떤 비아냥과 냉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두 의원의 정치적 선택 역시, "나를 죽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백년 그때처럼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의 재산인 방송을 재벌과 조중동의 사유물로 내어주는 언론악법을 강행처리한 이들은 "국회폭력"을 운운하고 있고, "범죄행위"는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며 야당의원들을 검찰에 고소하였습니다.

천정배 당원은 2009년 2월 국회 대정부 질문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역사의 법정에서 구차한 모습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국민에 대한 쿠데타를 멈춰야 합니다.마지막으로 이명박 정권에 성경 한 구절을 들려주고자 합니다.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4-15)" <출처 : 천정배 교육사회문화분야 대정부 질문>



2009년 명동성동 들머리의 언론악법 원천무효 천만인 서명운동이 13일째를 맞이 하였습니다.
명동성당 들머리는 국민으로부터 광장을 빼앗고, 방송을 장악하여 국민의 입과 귀를 막는 변종 독재세력을 고발하고, 국민의 분노가 표출되고 있는 민심의 현장입니다. 

또 100년이 흐른 후 명동성동 들머리에 어떤 표지석이 남아있을까요? 들머리 입구 왼쪽편에는 일제와 매국노로 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키려한 이재명 의사의 기념비가, 오른쪽 입구에는 조중동과 재벌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싸운 이들의 기념비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법정이 정녕 두렵다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반드시 언론악법을 폐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재명 의사의 기념비가 가르쳐주는 역사의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