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해 ‘한미FTA 비준반대’ 촛불을 들자
“다시 쓰는 한미FTA 비준반대 단식 일기 1 : 메아리 없는 외침”
한미FTA 문제는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안겨주었다. 2007년 3월 한미FTA 졸속 타결을 막고자 결행했던 25일 동안의 단식은 그 후 수년간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가져왔다. 또한 노무현대통령을 당내 경선때부터 지지하고 장관을 지낸 사람으로서 참여정부가 추진한 한미FTA의 타결을 반대하면서 엄청난 심리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미FTA의 비준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주권의 문제, 국익의 문제, 민생과 복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6년 2월 한미FTA 협상을 개시할 때 나는 법무부장관이었다. 그 개시 사실을 듣고 나는 한미FTA 체결로 자유무역을 강화하여 수출이 늘어나고 우리 경제가 성장하면 국민이 더욱 잘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막연한 인식만 가지고 있었다.
협상이 시작되면서 법무부 공무원들도 몇 분야의 협상팀에 팀원으로서 참여했다. 그 중 하나가 ISD 등을 다루는 팀이었다. 그러던 중 2007년 7월 초 무렵 법무부의 관련 간부가 협상상황을 내게 보고하면서 ISD에 대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한미FTA ‘Chapter11’의 투자조항에 있는 여러 문제 중에 ISD는 우리나라의 공공정책권, 사법주권 등 주권을 심각하게 제약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ISD와 결부된 ‘간접수용’이라는 개념은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정부 내 협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만든 표준조항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즉각 이 분야에 탁월한 전문지식과 식견을 갖춘 민변의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그도 법무부 간부와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그밖에도 나는 ISD에 대해 깊이 연구․검토한 끝에 정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이 문제를 정부 내에서 심각하게 제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한미FTA와 관련된 대통령 주재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당시 법무부장관은 한미FTA와 큰 관련이 없다고 보였는지 이 회의 말고는 관계장관회의 참석요청을 받은 바 없다. 결국 이것이 내가 장관으로서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한미FTA 관련 회의였다. 최근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이 ‘나꼼수’에 출연해 3월경 있었던 회의에 내가 참석했다고 했으나 내 기억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회의에서 미리 준비해 온 발언문을 보며 ISD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나는 ISD 삭제를 위한 협상논리까지 제시했다. “ISD는 투자자들의 권리를 강화하는 대신 정부의 공공정책권을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정부 입장에서도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라고 미국 협상대표를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분위기는 언뜻 느끼기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침묵이 있고서 노무현 대통령께서 입을 열었다. “법무부장관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경제부총리 책임 하에 관계부처가 두루 참여하는 대책반을 만들어 잘 대처하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신 것 같았다. 한 숨 돌렸다.
나는 그 직후 그러니까 7월 말에 법무부장관직을 그만 두었다. 밖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미 6월에 청와대에 장관직 사임의사를 밝혀 동의를 얻은 상태였다. 다만 사임 시기는 청와대의 판단으로 정하도록 돼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과 청와대 고위 관계자 몇 사람에 불과했다.
그 뒤 실제로 ISD에 관한 정부내 대책반이 만들어지고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상당한 수정이 있었다. 후일 한덕수 총리는 나와 최재천 당시 의원의 문제제기로 ISD의 문제점이 수정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 해 6월 법무부가 ISD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공무원교육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는 것은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다(경향신문, 2011.11.5자). 이 과정에 대해서는 당시 한겨레와 프레시안이 보도했고 최근에 다시 한겨레가 되짚었다(2011.10.30자).
나는 법무장관직을 그만두고 국회의원직에 전념하면서 한미FTA에는 ISD 이외에도 수많은 독소조항이 있음을 알게 됐다. 사실 ISD는 호주처럼 협상을 통해 뺄 수 있는 것이었다. 역진방지기제(래칫), 서비스개방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 등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한미 간의 이익의 균형도 심각하게 무너져 있다. 각 부문 별로 우리가 준 것은 많은데 실제로 받은 것은 거의 없다. 예컨대, 우리는 미국의 무역장벽을 뚫어서 수출을 늘릴 수 있어야 했는데 전혀 성과를 못 냈다.
나는 동료의원들과 한미FTA시국회의를 함께했고, 시민사회와 협력해 가면서 독소조항 제거, 이익균형 회복, 피해대책 마련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목소리는 정부는 물론 여당의 다수 의원과 한나라당에 의해 깡그리 무시됐다. 민주노동당 그리고 소수의 여당 의원들만 외롭게 외쳤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고 전문가들이 반대를 하고 토론회를 열어도 요지부동이었다.
2007년 3월 하순 양국정부가 협상타결시한을 앞두고 최종협상을 시작하게 됐다. 양국은 미국 의회가 TPA(trade promotion authority)에 따라 미국 대통령에게 협상권을 위임한 시한인 2007년 3월 말(미국시간)까지 협상을 마무리하기로 해 놓고 있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고심 끝에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로 하고 3월 26일 오후 단식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4월 2일(미국일자 4월 1일) 허무하게도 협상은 최종 타결되었다. ISD 등 독소조항과 그 밖의 수많은 문제들을 그대로 안은 채로... 나의 단식농성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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